Timeline

  • 1

    187. 11

    - 창평현 황건적 도륙 사건

    유주 연국 창평현에서 황건적 일백 명이 단신의 무장에게 몰살당했다.
    얼굴도, 출신도 모른 채 오직 한원명이라는 이름 석 자만이 알려지고, 세력을 모으던 군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한원명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 2

    189, 9

    - 첫 만남

    예주 초현에 잠시 머무르기로 결정한 한유는 한 카페에서 조인과 마주쳤다.
    조인은 낯섦을 기꺼워했다. 무료한 삶에서 찾은 자그마한 재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유는 그 안정을 두려워했다. 언제고 이 곳을 떠날 자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 당연히 제 미래를 받아들일 안일하고 부러운, 편안한 사람.
    그렇기에 조인이 불안을 선택한 날 한유는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그에게 유留라는 이름을 가르쳐 준 순간부터 어쩌면 머무름留은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 3

    190. 2

    - 군웅할거

    조인과 미묘하게 엇갈린 이후로 한유는 원소의 러브콜을 받았다.
    처음에는 궁금했고, 두 번째에는 안쓰러웠으며, 세 번째에는 설렜다.
    잠시 곁에 머무르기로 결정을 했다. 언제든 떠날 생각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은 탓일까, 원소는 꼭 입 안의 혀처럼 굴었다.
    상사로도, 난세에서 한을 구할 영웅으로도. 그리고, 어쩌면 한 나약한 부분이 있는 처연한 미인으로도.
    한유는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사랑이라도 하듯이.
  • 4

    192. 3

    - 배신?

    서로를 이용하자 계약을 체결했건만, 원소가 기주자사까지 오를 동안 한유는 여전히 한원명에 그쳤다.
    그제서야 알았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이용하기 위해 사랑하는 척 했을 뿐이라고. 설령 사랑했어도 이용보다 우선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시간은 흐르고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인연은 순리대로 헤지기 마련이다. 동시에, 스쳐갔던 우연이 인연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이를 만난 것인지. 아니면 익숙한 곳에서 낯선 이를 만난 것인지.
    조인은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한유를 알아보았다.
    다음 행선지를 정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 5

    193. 12

    - 서주 대학살

    모든 것이 완벽했던 어느 날, 그 일이 벌어졌다.
    주군이 모두를 죽이라 명했다. 한유는 그러지 못했다. 손에 닿는 이들만이라도 살렸다. 고작 그 정도였다.
    황건적으로부터 백성을 지키던 난세의 객장 한원명은 역사에 서주의 학살자로 기록되리라. 스스로를 죽이고 싶어졌다.
    그 밑바닥에서 조인은 말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는 오늘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역사가 그리 기록된다 한들 스스로를 학의 방조자로 정의할 필요는 없다고.
    헛소리다. 어리석고 이기적인 말이다. 그런데.
    왜 이리도 위로가 되는 것일까.
  • 6

    195. 12

    - 허도에서, 첫눈이 내리던 날.

    진궁의 배신과 허도 탈환이라는 큰 일들을 해결하고 나서야 한유는 조인을 마주보았다.
    더 이상 부정할 이유도 명목도 없었다. 매일 일과가 끝나면 제 사무실에 찾아오는 조인을 보며 한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에 회의감을 갖는 대신 미련을 채워 살아가는 이유를 만들고, 상황을 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선뜻 시도하는 삶을 살고, 실패한 후에도 기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초조해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그가 퍼붓는 귀애貴愛에 잠식되었다. 그렇기에 감정을 솔직히 말할 수 있었다.
    당신과 연인이 되고 싶다고. 당신의 곁에 머무르고 싶다고.
  • 7

    199. 2. 7

    - 하비에서

    순유가 펜 끝으로 여포를 무너뜨린 날, 한유는 초라해진 진궁을 마주했다.
    이기적인 책사. 미움을 산 간언자. 어리석게도 여포를 선택한 배신자. 바닥을 칠 만큼 형편 없는 상황인데, 어째서 그 눈빛만은 여전할까.
    차마 바라볼 수 없던 처형대 위에서 한유는 결심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리라고.
    멋대로 주군을 버리는 멍청한 이들에게 정 따위 주지 않겠다고.
    난세의 객장은 더 이상 없다.
  • 8

    200. 10

    - 관도대전

    원소의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그 남자의 집착을 끝맺기만 하면 그만이다.
    어느 때에는 장수로, 또 어느 때에는 책사로 종군하며 한유는 온 전장을 돌아다녔다.
    그녀가 순우경의 목을 베어 원소에게 보낸 그 날 그 지긋지긋했던 연은 드디어 끊어졌다.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9

    202. 4

    - 가족이 생기다

    관도대전을 계기로 조조는 원소를 역전했고 남은 잔당들을 처리하는 일만 남았기에 둘은 모처럼의 휴가를 얻었다.
    혹시 상황이 어찌 될 지 모르니 이번에 식까지 올리라는 주군의 권유에, 드디어 했다. 결혼.
    떠날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 더더욱 머무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
    후회는 없다. 걱정도 없다.
    어쩌면 초현에서의 그 날부터.

Relation

하늘이 내린 장수, 하늘을 아는 책사

일상에서 전장으로. 그리고 또 일상으로.
조조군의 가장 강력한 인간 병기. 촉을 상대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하늘이 내린 장수 조인.
단신으로 천 명을 참할 재주千斬之才와 하늘을 알고 읽어 내리는 재주知天之才를 지닌 책사 한유.
누구든 탐을 낼 만한 재능과 배경을 지닌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의외로 평범하기 그지 없었다.
어느 한 작은 마을로 이사를 온 아가씨와 그 마을의 도련님. 오며 가며 마주쳤을 뿐인 특별하지 않은 우연.
첫눈에 반했다지만 매달리는 성정이 아니었고, 신경이 쓰였다지만 먼저 손을 건네는 성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연으로 남을 줄 알았다.
우연은 인연이 되고, 인연은 연인이 되고. 자연스러운 수순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의 일이었다.

짖지 않는 개, 날지 않는 새

전장에서는 용맹하나 일상에서는 차분한 조인과 전장에서는 침착하나 일상에서는 활기찬 한유.
둘은 퍼즐처럼 서로를 채울 줄 알았다.
한유가 세운 계책을 가장 잘 이행하는 이는 조인이었고, 말 없는 조인의 취향을 가장 잘 아는 이는 한유였다.
먼 길을 돌아온 만큼 무얼 해도 안정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여느 관계가 그러하듯, 둘 역시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과거의 일을 탓하지 않을 것.
서로를 떠나지 않을 것.
서로 분노를 갖지 않을 것.

그리고, 서로보다 주군을 우선할 것.

Characters

조인

조인의 삶은 정해져 있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관직에 오르고 살아가는 것.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무료했다.
형을 따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쉬운 길을 두고 구태여 제가 꽂힌 어려운 길을 열어갔으니.
그런 삶에 까마귀 한 마리가 들어와 창가에 앉더라. 새까맣고 자그마한, 제가 손을 뻗으면 바로 날아가 버릴 그런 새가. 조인은 창가로 만족했다. 가만히 있다면 언제고 볼 수 있는데, 놓칠지도 모를 손해를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삶이었다.
갑작스럽게 그 안정된 무료함을 깨뜨린 것은 제 의지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 불안정조차 정해진 삶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형이 연 길을 얌전히 따라가는 것. 그렇게 조인은 안온했던 집을 벗어나 창 밖으로 나갔다.
그 곳에 그 새가 있었다.
딛고 선 곳이 불안정해지고 나서야 그는 새에게 손을 뻗을 수 있었다.


cm. 밤님

한유

한유는 언제나 선택을 강요받았다. 날 때부터 없던 아버지.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던 어머니. 가난한 집안의 어린 여자아이. 치열했다.
다행히 좋은 어른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성장했지만 그녀는 그 탓에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었다. 속내를 드러내기 싫어서.
그렇게 스쳐지나가던 어느 곳에서 한유는 한 커다란 개 한 마리를 만났다. 누가 집에 들어설라치면 언제고 이빨을 드러내며 경계를 할, 하지만 지금은 나른하게 누워 햇빛을 쬐고 있는 저택의 번견. 제 연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떠났다.
떠난 곳에 그 개가 있었다.
잔뜩 경계를 하고 있던 개는 자신을 보고 살짝 꼬리를 흔들었다. 참 우스운 일이지. 저 사나운 표정에서 나른하게 잠든 모습이 보이다니.
그렇게 그녀는 그 개 옆에 둥지를 틀었다.
왜인지 편안해졌던 탓이다.


cm. 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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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rrythesurf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