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留
一. 난세의 검재
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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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4 14:10

187년 11월. 유주 연국 창평현 난세의 검재劍才는 축복인가, 저주인가. 한유는 낯선 연락으로 빼곡한 제 휴대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지금만큼은 저주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는 것이라고는 제가 했던 행동 하나와 가린 이름뿐인 사람들이, 걸맞은 대우를 해줄 테니 제게 오라 끊임없이 구애하는 모습이 우스웠으니까. 제가 무엇을 요구할 줄 알고 걸맞는 대우 운운하는 것일까. 연락 하나하나를 지우며 차근차근 이름을 머릿속에 새기던 한유는 스승과의 채팅방을 눌렀다. [어디서 무엇을 했길래 네 이름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게냐?] 오랜만의 연락인데 인사 한 마디 없으신 것도 다우시다니까. 한유는 픽 웃으며 휴대폰을 톡톡 두드렸다. 그날 이후로 주위의 모든 것이 바뀌었음에도 그대로인 것이 있다는 게 퍽 마음에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그리도 돌아갈 곳에 목을 매는 것일까. [그냥 황건적 때문에 고생하는 마을 하나 구했어요.] 답장을 보내자마자 전화가 울린다. 영 메시지에 적응하지 못하는 스승께서는 언제나 말이 길어질 즈음이면 전화를 거시니까. 네, 스승님. 하고 전화를 받자마자 말이 쏟아져나온다. [이 녀석아, 비약도 적당히 해야 비약이다! 지금 네가 한 일로 온 뉴스가 도배되어있는데 하늘 같은 스승한테 하는 말이 그냥이냐?!] “다 아시면서 물어보신 거 아니셨어요?” [직접 들으려고 전화했다. …얼굴은 또 왜 가렸더냐? 내 입신양명하라 그리 일렀거늘. 자字는 또 왜 글자가 다르고.] “그런 것 관심 없는 것 아시잖아요.” 스승이 뭐라 뭐라 잔소리를 시작하자 한유는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앞길을 걱정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한유는 입신양명 같은 것은 헛된 꿈이라 여겼다. 십상시가 득세하고 황건적이 난을 일으킨 지가 벌써 몇 년째던가. 황제가 앞장서 관직을 팔아대는 세상에서 무슨 관직을 해 이름을 드높이라는 것인지. 정작 스승조차도 모실 사람이 없다며 연주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제게만 그러는 것이 영 마뜩잖기도 했다. [여튼, 몸조심하거라.] “네, 네. 다음에 연주 가면 들를게요.” 대강 통화를 마무리한 한유는 침대에 폭 하고 누워버렸다. 휴대폰을 꺼내 뉴스란을 누르자 기사 목록이 나왔다. 모든 기사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창평현의 객장, 황건적 수백 명을 단신으로 물리친 괴물. …의도치 않게 일이 커졌다 싶었다. 검재를 타고났고, 계책을 배웠기에 황건적을 물리치는 의뢰로 돈을 벌던 참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정도인 줄 알았는데, 말해 준 것보다 수가 많았다. 제가 죽어도 황건적 수는 줄어들 테니 그것을 노린 것일까. 아마 맞을 것이다. 모든 것이 마무리된 다음에야 무장한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왔으니. 약속한 돈을 받고 마을을 빠져나와 현 변두리의 한 여관에 들어왔지만 아무래도 조만간 아예 창평현을 떠야 할 듯싶다. “한원명….” 기사 속의 제 이름을 낮게 읊조리던 한유는 피식 웃었다. 자字를 이름마냥 쓰게 되었구나 싶었다. 본래 그리 쓰라 받은 이름이었지만 한유는 왜인지 가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편한 인간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음에도 관을 틀어 올려 제 모든 것을 숨기는 인간. 한유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유주에서 유명해졌으니 서둘러 멀리 가버려야지. 예주 정도면 좋겠네. 가는 길에 연주도 들려서 스승님도 뵙고, 늘 그렇듯이, 가벼운 마음이었다. 189년 9월, 예주 패국 초현. 예주에 자리를 튼 지도 석 달이 지났다. 유주에서 예주까지의 거리가 멀기도 하거니와 오는 길에 스승까지 뵙고 온 탓에 시간이 더 길어졌던 것이다. 그동안 십상시는 난을 일으켰고, 동탁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세상은 더더욱 흉흉해졌다. 그리고 스승은 더 이상 제게 입신양명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기꺼우면서도 마음에 차는 변화는 아니다. “어서 와요, 유아 양.” 자주 가던 카페로 들어가자, 사장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연갈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젊은 남자였다. 예주에 온 이후로 일주일에 서너 번은 온 탓에 안면을 텄더랬다. 물론 자신이 그 한원명인 것은 모르겠지만. 예주에서의 자신은 일개 객장이 아닌, 막 이사를 와 휴가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부러 그렇게 이미지화한 것도 있었다. 머리를 풀어 길게 늘어뜨리고, 흰색의 원피스나 청바지 같은 캐주얼한 옷을 주로 입어 한원명과의 거리를 벌렸으니까. 물론 유아留娥라는 아명을 다 커서 듣는 것은 낯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늘도 딸기 스무디?” “치즈 케이크도요.”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디저트가 수준급인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 난세에도 평화로운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제를 하고 카드를 돌려주며 사장이 무언가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웬 간 큰 인간이 동탁을 죽이려고 했다더라고요. 죽이지는 못했는데 도망은 성공해서 수배지가 뿌려졌더라고요. 신고하라는 말은 안 하지만 유아 양도 얼굴은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마따나 그가 건네준 것은 수배지였다. 녹색과 회색을 언뜻 섞은 푸른 머리카락과 짙푸른 눈동자의 남자. 눈매가 날카로운 것이 퍽 매력적이었다. 한유는 얼굴을 눈에 새기고는 수배지를 돌려주었다. “조조라면, 그분이죠? 전 태위 어르신 아드님.” “네. 여기가 조曹가의 본적이라 수배지가 제일 먼저 왔어요. 아무래도 머리색이나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이 있을 테니까.” 음식은 자리에 가져다주겠다며 이야기를 끝내자 한유는 늘 앉던 창가 자리 소파에 가 앉았다. 조조라. 태위까지 지낸 조숭의 아들이라면, 과거 황제를 셋이나 모셨다는 환관 조등의 손자 아닌가. 그런 신분의 사람이 동탁을 암살하려다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니, 꽤 흥미로웠다. 아직 조정에 정의로운 사람이 한 명쯤은 남아 있었다니. 그리고 우연히 자리를 잡은 곳이 그의 고향이라니. 한유는 생각을 마무리 짓고는 카페 안을 슬쩍 살폈다. 작은 카페인지라 사람은 몇 없었지만 빈자리도 없었다. 주위를 훑던 시선에 문득 사람 몇 명이 걸렸다. 조금 전 보았던 수배지의 그와 같은 머리색을 한 남자들. 사장이 말했던 조曹가의 사람들인가 싶었다. “딱 봐도 눈에 보이죠?” 음식을 가져다주며 사장이 말을 붙이자 한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큰 장정 여럿이 몰려다니는 것은 어디든 시선을 끌기 마련이다. 한유는 그쪽을 보다가 문득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훤칠하고 선이 굵지만 두툼하다기보다는 호리호리한 인상의 안경을 쓴 남자. 그의 눈이 가늘어지자 한유는 시선을 돌렸다. 사람을 두려워해 본 기억은 없지만, 저 남자는 순간이나마 자신을 압도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처음으로 느낀 감정에 한유는 입술을 축였다. 새콤한 딸기 스무디가 그나마 정신을 일깨웠다. “의외네요. 저분이 다른 사람 보는 건 처음인데.” 사장의 말에 한유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초현은 살기 좋은 곳치고는 꽤 외진 탓에 오가는 사람들마다 두루두루 알고 지내니 인기 카페의 사장이 조가의 일원을 모를 리가 없긴 했다. “어떤 분이신데요?” “시중을 지내셨던 조치 어르신의 장남이시죠. 무뚝뚝하시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주위에 통 관심이 없으신 분이라 창밖을 보시거나 형제들 아니면 눈도 잘 안 마주치시던데….” 안 마주치는 사람이라더니, 아주 정통으로 마주쳤더랬다. 한유는 저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 차가운 푸른 눈동자를 상기하고는 애매하게 웃었다. 사장은 푸근하게 웃었다. “유아 양이 그만큼 예쁜 탓이죠, 뭐.” “꼭 잘 나가다가 그런 식이죠, 사장님은?” “진심인데? 그럼 잘 먹고 가요.” 사장이 웃으며 카운터로 돌아가자 한유는 입을 비쭉 내밀며 치즈 케이크를 한 입 잘라먹었다. 이 와중에 디저트는 참 맛있단 말이지. 이래서 장난에 당하면서도 이 카페를 끊지 못하는 것이다. 한유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푸른 하늘이 썩 마음에 들었다. * “브라더, 어디 보니?” 모처럼 넷이 밖으로 나온 길이었다. 큰형이 수배를 당하고 연락이 되지 않으니 영 뒤숭숭한 터라 기분이라도 전환할 겸 카페에 나왔던 것이다. 익숙하게 메뉴를 고르고 결제한 조홍이 자리에 앉으며 묻자, 하후돈과 하후연의 시선이 조인에게 향했다. 조인은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지만 조홍의 눈에는 시선의 끝이 걸렸다. 흰색 레이스 블라우스와 청반바지를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 독특한 차림은 아니었지만 눈에 단박에 띌 만큼 미인이었다. 하늘에 먹 한 방울 떨어뜨린 듯 약간 흐릿한 푸른 눈동자도 인상적이었다. 조홍이 그녀를 바라보자, 조인은 그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치워.” “우리 브라더,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냥 눈이 높은 거였구나.” 평소라면 그런 것이 아니라느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느니 하는 말을 했을 막냇동생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조홍은 그제서야 놀라버렸다. 그런 조홍을 본 조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데 눈치는 빨라 가지고. 말없이 앞에 놓인 커피를 빨대로 휘젓는 조인의 시선이 다시 그녀 쪽을 향했다. 어차피 들킨 것,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없어서다. 사장과 이야기를 하다가 슬며시 웃는 것이 퍽 예뻤다. 아버지와 가문의 명성 탓에 접근해오는 사람은 잔뜩 있었지만, 그런 그조차도 드물게 볼 미인을 우연히 만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이네. 이사라도 왔나?” “사장님하고 친해 보이는데 물어볼까.” 하후연이 턱으로 카운터를 가리켰지만 조인은 눈을 내리깔고 커피만 마셨다. 셋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조인은 언제나 그랬다. 장남답게 무뚝뚝하고 자기 할 일 철저히 해내는 듯하지만 막내로 자란 탓인지 가끔 알게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곤 했다. 하지만 또 그에게 약한 것은 사실이라 셋은 군소리 없이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아니, 둘. 조홍은 받아줄 때도, 거절하며 놀릴 때도 있었으니. 지금도 똑같다. 대신 물어봐달라는 무언의 어리광. 마침 사장이 사이드 디쉬를 들고 테이블로 오자 하후연은 사장을 쿡쿡 찔렀다. “사장님. 저기 검은 머리 아가씨 누굽니까? 처음 보는데.” “아, 저기 창가 앉으신 분 말씀하시는 거죠? 세 달 전에 이사 오셨다더라고요. 여기 오신 지는 한 달쯤 된 것 같고. 저도 자세히는 잘 몰라요. 본인이 말하기를 꺼려서.” 더 말할 생각이 없다는 듯 맛있게 드시라는 말을 남기고 사장이 돌아가자 셋의 눈동자가 동시에 조인에게 향했다. 형들의 시선에 감상을 말하라는 무언의 압력이 섞여 있었음에도 조인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시선을 거두었다. 당장 말을 걸 만한 용기가 있었다면 사장에게 물어보기 전에 제가 먼저 나섰을 테니까. 그저, 기회를 노리기로 했을 뿐이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우연히 마주칠 때가 오지 않을까. 아니, 우연히 마주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절대 잊어버릴 리 없는 얼굴을 다시 되새기며, 조인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